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국민유격수로 자리 잡은 삼성 라이온즈의 박진만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활짝 그리고 예쁘게 웃는다. 지난 7월 25일 두산전이 있던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박진만은 바로 그런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제자리로 돌아와서일까. 시즌 초반이었던 4월 21일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온 5월 25일부터 공수의 핵으로 그동안의 부상공백 메우기에 나선 박진만에게 물었다. ‘나는 ( )다’ 빈칸을 채우시오. 그랬더니 박진만의 대답은 ‘나는 운이 참 좋았다’였다. 스스로 운이 참 좋았다는 남자, 박진만의 행운 연대기를 소개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려서부터 땀 냄새 가득 풍기며 동네 골목길과 학교운동장을 뛰고 달렸던 박진만은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운동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박진만은 초4 교내 체육대회에서 공 던지기 1등을 했다.
박진만 : 아버지, 저 오늘 학교 체육대회에서 공 던지기 1등 했어요.
아버지 : 그래? 우리 아들 어깨가 좋은가봐? 아들, 우리 야구하자.
그리고 아버지는 박진만을 야구부가 있는 인천 서화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동안 학업을 이유로 본격적인 운동은 반대했던 아버지는 박진만에게 야구를 소개했다. 처음으로 새하얀 야구유니폼을 입던 날, 하얗고 단단한 야구공을 손에 쥐던 날, 박진만의 가슴은 쿵쾅거렸다고 한다. 포지션은 투수. 하지만 초등학교 때와 달리 많이 자라지 않은 중학교 시절, 박진만은 투수로서는 불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단다.
유격수로 변신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한 박진만. 마치 족집게처럼 자신의 고민을 콕 짚은 감독으로부터 유격수 변신을 제안 받는다.
감독 : 박진만, 너 중학교 때까진 투수였지만 솔직히 체격이 좀 작다고 생각하지 않냐? 하지만 어깨는 좋아. 그래서 말인데. 너 유격수해라. 마침 자리도 딱 비었고 지금 하면 바로 주전이다. 고1이 주전으로 뛰기 힘들다, 너.
브라보! 쾌재를 부른 박진만은 그렇게 유격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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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유격수 박진만이 SK 이진영을 런다운 플레이로 잡아내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
부상과 부활 타고난 어깨와 정확한 송구, 그리고 센스있는 경기로 박진만은 고1 때부터 고교 최고의 유격수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고2 때, 박진만은 왼쪽 무릎 십자인대와 측면인대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박진만 : 저, 야구… 계속할 수 있나요?
의사 : 그냥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운동은 포기해라. 만약 이 상태에서 계속 운동을 한다면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아야할 거야.
하늘이 노래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7년을 야구에 목숨 건 촉망받는 고교선수에게 그것은 마치 잘나가던 회사가 상장을 앞두고 부도가 나 버린 꼴이었다.
“많이 울었죠. 야구를 안 하면 내가 뭘 하나. 무섭고 화나고. 그때 생전 처음 깡 소주를 마셨어요. 그러다 결심했죠.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물러서지 말자, 한번 해보자, 끝장을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로 휴학했어요. 그리고 혼자 헬스클럽과 수영장을 오가면서 1년 동안 재활훈련을 했어요. 그때 사실 당시 태평양으로 가기로 거의 다 이야기가 돼있었거든요. 근데 인생이 말이죠, 그 치명적인 부상으로 한해 거르고 나니까 현대 유니콘스가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현대맨이 되다 지독한 재활로 더 강해진 박진만은 당초 예상 진로였던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의 프러포즈를 받는다. 그리고 태평양에 비해 거의 3배 이상 차이가 났다는 2억 8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으며 1996년 프로야구로 입성했다.
현대로 입단한 박진만은 대한민국 최고의 유격수 출신의 김재박 감독과 정진호(현 LG 수석코치) 당시 현대 수비코치를 만난다. ‘유격수가 게임을 뛰려면 수비가 돼야한다’는 지론을 가진 김재박 감독과 정진호 코치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박진만을 갈고 닦았다. 그 덕에 박진만은 데뷔하자마자 주전유격수 자리를 꿰찼고 그해 준우승을 일구는 거름도 됐다.
“그때 야구에 눈을 뜬 거죠. 진짜 3~4년은 죽어라 수비연습만 시키더라고요. 그때는 ‘그만 좀 하지’라고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 다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진만 유격수 인생에 최고의 보약을 섭취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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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제도 그리고 삼성 그렇다. 현대 입단 이후 최고의 코칭 스태프로부터 최고의 유격수로 조련된 박진만이 무럭무럭 자라던 1999년 한국프로야구에서도 FA제도가 마련됐다. 박진만은 달렸다. 2000년, 2003년, 그리고 2004년까지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맞은 2004년 FA. 박진만은 39억 원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선동열 감독의 지키는 야구와 궁합이 딱 떨어진 박진만은 삼성의 2005년,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꽃이 됐다.
그리고 2006년 박지만은 WBC에서의 명품 수비로 국민유격수로 등극했다.
황금돼지해 ‘아빠’ 2007년, 박진만은 결혼 3년 만에 아버지가 됐다. ‘박지후’라는 아들이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아기였기에 황금돼지띠인 ‘지후’는 그야말로 ‘황돌이’인 셈이었다.
성실함이 부른 행운 시즌 초, 이른 부상으로 봄 한철 주춤했던 박진만은 부상 없는 야구인생을 소원한다. 성실함과 꾸준함이 동반해야만 하는 2000 안타와 2000 게임을 희망한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선수보다는 한결같은 선수가 되기를 갈망한다.
치명적인 부상을 치열한 노력으로 행운의 역전 홈런으로 꽃피운 박진만의 야구인생. 어떻게 하면 그렇게 운 좋은 사나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박진만은 대답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96년 프로에 데뷔해서 올해로 12년차인 박진만에게 물었다. 프로란 무엇이냐. 박진만은 ‘프로란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즐기면서 야구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박진만의 야구가 어떻게 화룡정점을 찍을까, 어떻게 꽃을 피울까 지켜보고 싶다. 응원하고 싶다. 박진만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바란다.
김은영 MBC라디오 아이러브스포츠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