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006년

박진만 눈으로 본 '2006 프로야구'

사비성 2006. 12. 28. 20:10

박진만 눈으로 본 '2006 프로야구'

 

박진만(30·삼성). 그를 빼놓고 2006년 한국야구를 얘기할 수 있을까. 1월 스프링캠프를 시작으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아시안게임까지. 올해 한국야구가 걸어온 길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함께 한 사람은 감독, 코치, 선수를 통틀어 오승환(24·삼성)과 박진만 둘 뿐이다. 특히 박진만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고, 현대시절을 포함해 4년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한국야구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중심인물 박진만의 육성을 통해 2006년 한국야구를 돌아본다.



◇1월 전지훈련

WBC에 초점을 맞췄다. 프로 11년째인데 3월에 정식경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이때만 해도 WBC는 단순히 친선게임 정도로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몸을 빨리 만들어야하나…. 나뿐만 아니라 WBC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는 멤버들 모두 이런 생각 아니었을까.

◇2월 WBC 대표팀 후쿠오카 소집

해외파들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팀워크가 문제될 것은 없었다. (박)찬호형 하고는 처음 한솥밥을 먹게 됐지만 (서)재응이와 (김)선우는 청소년대표팀에서 같이 뛰었다. 동갑인 (이)승엽이야 다들 아는 사이고…. 그런데 삼성 오키나와 캠프에서 대표팀이 소집된 후쿠오카로 이동했을 때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일본과 미국 등 외국기자들도 몰려들었다. WBC가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3월 WBC 일본을 꺾고 미국으로 가다

도쿄로 이동했다. 1차전 대만을 이겼다. 인터넷을 보니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WBC는 무조건 이겨야하는 대회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중국을 꺾은 우리는 일본에 져도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치로가 ‘30년간 한국이 이기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도록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똘똘 뭉쳤다. 2점을 뒤지고 있던 4회 2사만루에서 (이)진영이가 다이빙캐치로 안타성 타구를 잡아냈다. 그 공이 빠졌으면 콜드게임패를 당할 수도 있어 아찔했다. 2-1로 뒤지던 8회에 승엽이가 역전 투런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이겼다. 도쿄돔이 쥐죽은 듯했다. 우리 선수들과 한국 응원단은 난리였다. 집사람한테 전화했더니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했다. TV 9시 뉴스가 온통 야구얘기로만 채워졌다고 했다.

◇3월 멕시코도. 미국도. 일본도 꺾고. WBC 4강신화

첫 상대인 멕시코 정도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기장에 들어가보니 TV에서 보던 애들이 멕시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주눅이 조금 들었다. 그런데 승엽이가 또 홈런을 치면서 2-1로 이겼다.

다음 상대인 미국 멤버는 화려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훈련할 때 우리는 벤치에서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촌놈들처럼 훈련을 쉬는 그들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7-3으로 미국을 거짓말같이 이기고 4강진출을 확정했다.

미국의 제이슨 배리텍이 김선우에게 밤에 전화를 걸어와 “제발 일본에 꼭 이겨달라. 그래야 우리가 4강에 간다”고 애걸했다. 어찌나 웃겼는지. 그런데 우리가 또 일본을 꺾었다. 근데 뭐야. 미국이 멕시코에 져? 4강에서 일본과 3번째 붙었는데 졌다. 6연승 뒤 첫 패배였지만 보따리를 싸야했다. 차라리 4강에서 미국에 졌더라면. 그래도 한국에 돌아오니 우리는 영웅이 돼 있었다.

◇4월~9월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류현진이라는 대형 신인투수가 프로야구판을 뒤흔들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공은 빠르지만 직구와 커브 정도만 던져 칠 만한 투수로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클 체인지업을 배워 정말 무서운 투수로 발전했다. 이대호는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했다. 상대팀에서 뛰다가 아시안게임 때 함께 있다보니 한 단계가 아니라 몇 단계 성장한 타자로 보였다.

송진우 선배는 통산 200승을 기록했고. 양준혁 선배도 날마다 대기록들을 세웠다. 한국야구가 더 발전하려면 노장선수가 많아야한다. 우리는 서른 둘 셋 정도면 노장이라고 하는데 미국은 마흔살 선수도 많지 않은가.

◇7월 올스타전. 10월 한국시리즈. 11월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올스타전을 앞두고 제주경기 때 베이스를 잘못 밟아 발목을 다쳤다. 많은 팬들이 나를 보려고 뽑아줬는데 1회밖에 못 뛰고 교체돼 미안했다. 한국시리즈에서 한화를 만났는데 연장전을 3번이나 치렀다. 우리도 힘들었는데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 한화의 정신력도 정말 대단했다. 우리는 우승했고. 나는 운좋게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에 올스타전이나 포스트시즌에만 관중이 반짝하는 것은 정말 아쉽다.

작년에 이어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에 나갔는데 이번엔 선수들이 몹시 지친 상태였다. 대만 라뉴에 졌다. 우리가 WBC에서 일본을 이겼듯이 대만도 우리를 이길 만큼 성장했다. 이제는 아시아 3국이 단판승부에서는 당일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만큼 수준이 좁혀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12월 아시안게임 참패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 당연히 금메달을 따려고 갔다. 그런데 대만은 해외파들이 모두 참가해 힘이 느껴졌다. 금메달이 날아갔다. 숙소에 처박혀 지냈다. 같은 숙소에 다른 종목 선수들도 있어 눈치가 보여 식사 때 외에는 방에서만 지냈다. 나가라고 해도 나가는 선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본전에는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를 외면했다. 경기야 이기고 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패배는 언제나 아프다. 정말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2006년의 시작은 천국이었지만 마지막은 지옥이었다. 2006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도 정말 잊을 수 없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