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016년

더그아웃 인터뷰

사비성 2016. 2. 1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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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최익래

Location 인천 SK 행복드림파크


“야구는 제 인생입니다. 여태까지 제가 살아온 계기이자 목표가 됐거든요. 비록 선수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야구계에 몸을 담고 있을 테니 제 인생입니다.” 1,993개의 인생에서 그가 빚어낸 명장면은 숱하다. ‘그가 놓치는 공은 누구도 잡지 못할 것’이라는 문장이 과찬으로 다가오지 않고 덤덤한 말투로 느껴지는 이유다. 글로 전하기 힘든 박진만의 ‘전설’을 꾹꾹 눌러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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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누구든 인터뷰는 어렵다. 낯선 이를 만나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나부터가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라’는 미션이 떨어진다면, 쉽지 않을 터. 게다가 상대가 어렵게 입을 뗀다면 그것에 공감해야 한다. 거기에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내야만 한다면? 어찌 한 사람의 인생을 원고지 몇 장에 담아낼 수 있으랴. 여러모로 힘든 과정이다.


늘 어려운 인터뷰지만, 이번엔 더욱 어려울 것만 같았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넥센 히어로즈의 전신)에 입단한 이래 20년 간 1,993경기에 나선 선수. 수상내역만으로 A4 한 면은 채울 수 있는 선수. 유튜브에 이름을 검색하면 하이라이트 영상만 수백 개가 나오는 선수. 그야말로 전설, SK 와이번스 박진만 수비코치를 더그아웃 매거진이 만났다.


그의 사복 차림이라 해봐야 시상식에서나 보던 정장이 고작이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박진만 코치가 낯설면서 친근했다. 


수천 번 해봤을 촬영임에도 “여전히 어색하네요”라며 너털웃음 짓는 그에게 ‘전설의 엄격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춥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 정도 안 추우면 그게 겨울인가요?”라며 되물어오는 박진만 코치는 그렇게 ‘어려운 인터뷰’를 쉽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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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코치 박진만


코치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수술한 지 얼마 안돼서 재활에 매진했습니다. 캠프 준비도 했고요.


코치로서 하는 캠프 준비는 선수 때와 다를 것 같습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지는 않아요. 이제 코치가 지도만 하는 시대는 갔거든요. 선수들과 어울려서 훈련해야 하고, 또 가끔은 시범도 보여야 해요. 한창 몸만들기에 열중했죠. 선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내내 연습했는데도 아직 ‘박진만 선수’가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아요. 코치님도 어색하진 않으신가요?

선수들이 제게 ‘박 코치님, 박 코치님’ 합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형님~’하던 사람들이면서요. (웃음)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긴 하죠. 어색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박 코치님!’이 아니라 ‘바…, 박…. 박 코치님!’이거든요. 저희 팀 후배들에게는 ‘듣는 사람이 더 어색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나 봐요. (웃음) 제가 적응해야죠. 코칭스태프 회의 때도 마찬가지예요. 박경완 수석코치를 비롯해, 박 코치가 몇 명 있거든요. 그래서 김용희 감독님께서 ‘이봐 박 코치!’ 하면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요. 정작 저는 고개가 선뜻 안 돌아가고요.


제가 생각해도 어색하네요.

그래서 감독님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어요. 저를 ‘만 코치’라고 부르십니다. 다른 코치들이 헷갈리지도 않고, 저도 바로 고개를 돌릴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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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천재 박진만

전설의 이야기는 여전히 생생하게 구전되지만, 정작 전설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찾기 힘들었다. 박진만 코치가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가 궁금했다. 전설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보다 2년 앞선 1986년, 그러니까 무려 제5공화국 시절에 ‘초등학교 4학년’ 박진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열린 멀리던지기 대회가 신호탄이었다. 야구부가 없는 학교에서 ‘재미삼아’ 시작한 야구공 멀리던지기 대회, 1등은 소년 박진만의 몫이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던 그였기에 아버지가 야구부 입단을 제안했다. 선뜻 수락한 소년 박진만은 야구부가 있던 서화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 대회가 아니었더라면 야구선수가 안 됐을 거라고 회상하는 박진만 코치.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이 얘기를 어디까지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웃음) 사실 제가 공부를 곧잘 했어요. 초등학교, 아니 그때는 국민학교였죠. 국민학교 때는 성적이 좋았습니다. 반에서 10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야구 저변이 넓지 않았고, 프로에서 성공하기 더 힘든 때였어요. 공부도 적당히 하는 애가 운동한다니까 담임선생님이 뜯어말릴 정도였습니다. 믿어지시죠?”


처음에는 그의 전설적인 수비만큼 믿기 힘든 얘기였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많은 전문가들은 ‘야구는 머리가 좋아야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야구에서 국내 최정상 자리에 올랐으니, 당연히 공부도 곧잘 했으리라.


코치님.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투수를 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작 고등학생 때 체득한 수비만으로 국내 최고 유격수가 됐다니. 그야말로 천재 아닙니까?

아닙니다. (웃음) 인천고등학교가 유격수 포지션 풀이 좁았어요. 투수 출신이라 어깨가 괜찮고, 몸이 유연한 편이라 감독님의 제안을 받았죠. 대학교 팀이랑 연습경기 할 때 소질 있다는 칭찬도 들었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천재가 아니라고요? (웃음)

투수는 던지고, 잡고 그러면 되잖아요. 물론 그게 어렵지만요. 반대로 유격수는 수비 포메이션부터 작전까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적응하기 참 힘들었죠. 1학년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생각 없이. (웃음) 1년 정도 지나니까 유격수에 대해 약간의 감이 오더라고요. 심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그때부터 좋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천재의 길을 걷던 박진만 앞에 암초가 놓인 건 1994년 겨울이었다. 고3 진학을 앞둔 그는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만 해도 십자인대 파열은 흔치 않은, 큰 부상이었다. 당시 그가 받은 진단은 ‘운동을 계속 한다면 장애인이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일상생활에 지장 받지 않으려면 야구를 그만 두라는 말. 거기에 굴했다면 ‘국민 유격수’는 없었을 터. 어떤 결심이 그를 야구장으로 이끌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때까지 야구만 보고 달려왔는데, 멈춰야 한다니요.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장애인이 되더라도 그 순간까지 야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정보가 많지 않을 때라 닥치는 대로 재활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부터 수영 등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가 고작이었죠. 신기한 건, 그런 수준 치고 재활이 상당히 잘됐다는 사실이에요. 몇 년 뒤 소견을 받으려고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는데 웬걸, 부상 흔적이 아예 없답니다. 재활이 아주 잘 됐죠.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느꼈을 만큼 큰 부상이었지만 아주 다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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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느낀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십자인대 파열이 박진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만 해도 박진만은 고려대학교 진학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프로행을 택한다면 지역 연고 팀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아야만 했다. 태평양의 부진한 성적과 열악한 모기업 지원은 그를 고려대학교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부상으로 1년 유급해야 했던 그의 입학은 보류됐고, 태평양 입단만이 남은 선택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1995년,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했다. 명문구단 현대 유니콘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의 지원은 태평양과 천지차이였다. 단숨에 명문 도약을 위해 공격적 투자를 펼친 모기업 덕분이었다. 그리고 1996시즌, 박진만은 현대에 입단했다. 부상이 그의 20년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셈이다.


만두 박진만


태평양 시절과 비교할 수 없는 조건으로 현대에 입단하게 되셨죠.

네. 그런데 현대 입단은 그런 물질적 조건 때문만이 아닙니다. 창단부터 사령탑을 잡았던 김재박 감독님의 존재가 컸죠. 김재박 감독님은 저를 당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셨나봐요. 저를 보러 인천에 찾아오셨어요. 등번호 7번과 유격수 자리를 약속해주셨죠. 평생 우상으로 여기던 사람이 나의 가치를 알아본다면? 그 신뢰와 감동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이 바뀌리라 확신합니다.


그렇게 염경엽 (現 넥센 히어로즈 감독) 선수를 밀어내셨고요.

네. 당시만 해도 ‘프로니까 내가 잘하면 선배도 제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아니더라고요. 특히 염 감독님이 저를 정말 잘 돌봐주셨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하고 존경스럽죠. 왜 팀마다 잘 맞는 선수 그룹이 있잖아요. 저와 염경엽 선수, 김경기 선수(現 SK 퓨처스 팀 감독), 이숭용 선수(現 kt 위즈 타격코치)가 그랬어요. 경기 끝나면 함께 저녁 먹고, 가족들끼리도 모이고요. 어릴 땐 고마운 줄 몰랐지만 참 대단한 분들이에요. 그런 선배 복 덕분에 팀에 적응할 수 있었죠.


현대에 입단한 박진만은 이내 ‘만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진만이→찐만이→찐만두→만두의 과정으로 탄생한 별명이다. 그 만두는 데뷔와 동시에 KBO리그 3-유간을 평정하게 된다. 그 후원자는 당시 현대 수비를 지휘하던 정진호 수비코치였다. 정진호 코치는 ‘유격수는 타격보다 수비’라는 지론 아래 박진만을 호되게 길러냈다.


정진호 코치가 ‘수비달인’을 만든 비결, 공개 가능하십니까?

훈련이죠. 첫 3~4년 동안은 스프링캠프 때 스윙한 기억이 없어요. 물론 팀 배팅 훈련할 때야 방망이를 잡아야 했지만 그게 전부였어요. 정말 오직 수비만 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요. 기본기가 쌓이다보니 꾸준히 경기에 나갔고, 그 기본기에서 호수비가 나왔죠. 기본이 안되면 좋은 플레이 절대 안 나옵니다.


그럼 코치님도 앞으로 ‘자질이 보이는’ 선수에게 그런 지도를 하실 건가요?

힘들죠. 그건 정진호 코치님이 ‘힘 있는’ 코치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이제 막내 코치인걸요. 또 요즘은 수비만 잘한다고 경기에 나설 수 없어요. 타격도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죠. 비중은 여전히 6대4 정도로 수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정진호 코치가 만든 ‘최고의 유격수’ 박진만은 현대에서 최정상이 된 후 팀을 떠났다. 2005시즌을 앞두고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그는 4년 총액 39억을 받고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게 된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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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만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는 박진만이다. 마냥 그럴 줄만 알았지만, 그 역시 은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 왼쪽 무릎을 다친 박진만이었는데, 이번엔 오른쪽 무릎이 말썽이었다. 또 한 번의 십자인대 파열. 그는 그렇게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부상은 제 운명인 것 같아요. 부상 덕에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부상 덕에 끝내잖아요. 만약 다치지 않고 고려대에 진학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지 누가 장담했겠어요? 부상이 참 얄궂은 놈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박진만의 경력은 1,993 경기에서 멈춰졌다. 단 7경기 차이로 2,000경기 출장을 놓쳤기에 아쉬움이 크리라 짐작했다. “아니요. 2,000경기 출장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이유가 부상이잖아요. 인위적인 2,000경기 출장을 위해 팀 분위기를 흐릴 수 없었습니다. 시원섭섭하지만 쿨하게. 그렇게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부분 내야수들이 나이 먹을수록 수비력이 떨어지잖아요. 코치님은 예외였던 것 같아요.

제가 빠른 발을 가진 선수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발이 느린 대신 분석으로 수비해왔거든요. 상대 타자의 타구방향이나 궤적을 분석해서 좋은 수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데이터는 선수 생활을 이어갈수록 쌓이잖아요? 오히려 점점 수비가 좋아졌죠.


분석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 부탁드릴게요.

투수들은 경기에 앞서 상대 타자에 대해 분석하죠. 하지만 투수 뒤에 서있는 야수들은 안 그래요. 대개 상대 선발투수의 구종이나 투구내용을 분석할 뿐이죠. ‘수비수’로서 공부해야 합니다. 타격음을 듣자마자 첫 발을 뗀다면 타구가 글러브에 들어가 있겠죠? 그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유행하는 시프트도 마찬가지고요. 분석의 결과예요.


미리 움직이는 선택이 역동작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죠. 정말 철저히 분석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적어져요. 여태껏 상대 타자 타구가 제 분석을 크게 벗어난 적은 없어요. 저에게 수비 잘한다고 이야기하시잖아요. 어찌 보면 제가 분석을 잘한 거예요.


분석하는 습관을 처음 들이신 때는 언제입니까?

프로 데뷔 때 정진호 코치님이 타자 한 명 한 명 분석해 놓은 기록지를 만들어주셨어요. 처음에는 양이 너무 방대했지만 1군 선수들이 해마다 대거 바뀌지 않잖아요. 그게 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럼 ‘코치 박진만’이 중점을 두는 건 역시 분석이겠네요.

그렇죠. 공부하는 코치가 되어야합니다. 선수들 분석은 물론 그 내용을 선수들에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까지요. 사실 상대 타자 타구분석은 상대 선발투수 분석에 비해 금방 끝나요. 투수 분석의 절반 정도? SK 내야수들이 조금 귀찮아지겠죠? 대신 수비력 향상은 보증합니다. 그리고 그게 팀을 강하게 만들 겁니다. 흔히 ‘센터 라인’이라고 하잖아요. 이 말이 유격수에게 되게 영광스럽다고 생각해요. 팀 중심을 잡는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잖아요. 수비가 좋아야 투수가 마음 놓고 공을 던지죠. 결국 ‘투수놀음’인 야구를 잘하려면 수비 뒷받침은 필수입니다.


그렇군요. 인터뷰 막바지입니다. 팬들이 박진만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까?

지금 워낙 많은 사랑 주시잖아요. 국민 유격수라는 별명 들을 때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실 겁니다. 행복하게, 사랑 받으면서 야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팬분들 덕분이죠. 이제 지도자로 발돋움했는데, 팬분들이 새로운 별명을 지어주시지 않을까요? 상상치도 못한 ‘국민 유격수’ 별명만큼 기상천외한 별명을요. (웃음)


고향만두나 코치만두는…?

나이가 있으니까 귀여운 느낌의 만두는 이제 그만. (웃음)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이제 수비코치가 된 박진만입니다. 선수생활 동안 제게 주신 사랑, 에너지를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코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수 박진만’을 믿으셨다면 ‘코치 박진만’ 역시 믿어도 좋을 거예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네. 아 잠깐. 이 얘기를 빼먹었네요. 팬 여러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수비천재, 만두, 고향만두, 국민 유격수까지. 화려했던 그의 선수생활만큼이나 찬란한 별명들이다. 비록 2,000경기 출장이라는 금자탑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박진만에게 숫자 2,000이 중요할까. 남은 숫자 7은 그가 평생 달고 뛴, 그의 존재를 상징하는 백넘버로 채우면 될 것을. ‘1,993’경기마다 팬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영원한 ‘7’번 박진만. ‘제2의 박진만 만들기’는 불가능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박진만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가 숱하게 보여줬던 불가능한 수비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