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022년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사비성 2022. 7. 28. 16:48

[구도 인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2루수-정근우' '유격수-박진만'

 

[구도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회말 -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

인천야구 환희의 순간, 꼭짓점엔 그들이 있었다

▲유격수 '국민 유격수' 박진만
인천서 나고 자란 토박이 …1996년 고향서 프로 데뷔
올림픽·WBC 등 한국야구 황금기 내야진 진두지휘
2011년 다시 인천행…시간 지나도 안정적 기량 과시

 

2008년 여름 박진만(46)과 정근우(40)는 태극마크를 품에 안고 짐을 꾸렸다. 출발지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결말은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는 2011년 시즌부터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함께 입었다. 역대 최강 내야 수비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유격수-'국민 유격수' 박진만

2006년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린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선 파란 유니폼을 입은 유격수에 눈길이 쏠렸다. 미국 감독은 “유격수의 빛나는 수비에 졌다”고 했고, 멕시코 감독은 “한국 유격수가 인상적이었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고, 움직임도 빠르다”고 혀를 내둘렀다. 미국·멕시코·일본을 연이어 꺾고 준결승에 진출한 대표팀 수훈갑 박진만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박진만의 플레이는 '메이저리그급 수비'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도 그의 글러브에서 확정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또한 그의 더블플레이로 완성됐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인천 프로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던 유격수 이름 앞에는 '국민 유격수'라는 훈장이 붙었다.

인천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유격수는 역시 박진만이었다. 그는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와 2005년부터 5년간 몸담았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전성기를 보냈지만,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은 프로야구 경력의 시작과 끝을 고향 인천과 함께한 박진만을 잊지 못했다. “유격수의 대명사”, “대한민국 유격수 수비를 논할 때 1순위”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박진만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서화초등학교를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유격수 포지션에 자리잡았고, 1995년 전국체전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6년 입단한 박진만은 '불세출의 유격수'로 명성을 떨쳤던 감독 김재박과 조우했다. 둘의 만남은 인천에도, 프로야구에도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재박 등번호인 '7번'을 물려받은 박진만은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1998년 인천 연고팀이 첫 우승을 거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결승 2타점 2루타를 쳤고, 마지막 6차전에선 적시타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은 박진만과 인천을 갈라놓았다. 인천은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며 기량이 절정에 오른 박진만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그가 유격수를 맡았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부터 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번갈아 차지했다.

 

2011년 박진만은 10여년 만에 고향팀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2할8푼 타율로 녹슬지 않은 공격력도 선보였다.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라는 응원가 가사처럼 수비는 명불허전이었다. '박진만 시리즈'로 불린 201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는 백미였다. 박진만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호수비로 SK 와이번스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렸다.

 

박진만은 2015년 무릎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2000경기 출장 기록에 7경기를 남긴 채였다. SK 와이번스 수비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박진만은 삼성 라이온즈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고 있다. SSG 랜더스 수비코치 손지환은 “가장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유격수 올스타로는 1998년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이끌고 리그 최고 유격수로 도약했던 박진만이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