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010년

유격수도 흐르는 세월을 잡진 못한다

사비성 2010. 7. 26. 21:09
유격수도 흐르는 세월을 잡진 못한다

  2004년 3월 어느 날. 수원 시범경기가 끝난 뒤 김재박 당시 현대 감독은 박진만에게 포수 장비를 착용하도록 했다. 백네트 앞에 박진만을 세워놓고 김 감독은 펑고를 때리기 시작했다. 10m 앞에서 날아드는 강한 타구를 박진만은 몸으로, 글러브로 막았다. 어찌나 강하고 독하게 쳤던지 김재박 감독의 손바닥에선 피가 흘렀다.

당시 28세였던 박진만은 국내 최고 유격수였다. 1980년대 명유격수였던 김재박 감독도 박진만을 자신의 후계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혹하게 제자를 키웠다. "박진만이 최고지. 그래도, 유격수는 한 치의 틈도 있으면 안돼. 특히 뒤로 물러서면 안돼." 박진만은 2년 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메이저리거를 뛰어 넘는 수비'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유격수도 세월을 잡지 못한다

삼성 박진만(35)이 3루수로 전환한다. 명품 유격수로 불리며 골든글러브를 5차례나 차지했던 그도 시간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올해 들어 부쩍 순발력이 떨어져 좌우 타구를 예전처럼 따라갈 수 없었다.

어쩌면 박진만이기에 30대 중반까지 잘 버텨온 것이다. '제2의 김재박'이라고 불린 숱한 유격수도 서른이 넘어서면서 위기를 맞았다. "유격수는 내가 야구를 하는 이유"라고 했던 유지현(39·현 LG 코치)도 2002년 2루수로 전향했다. 서정환 전 KIA 감독도 유격수에서 2루수로 옮긴 케이스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신기의 수비를 보였던 이종범(40·KIA)도 일본에 진출한 뒤 외야수로 보직을 바꿨다. 맨땅이 많았던 국내구장에서 뛰다 주니치의 나고야돔 인조잔디의 빠른 바운드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종범도 처음엔 저항했지만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변신을 받아들였다.

프로야구의 명유격수들 중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건 김재박(MBC-LG)과 류중일(삼성) 정도다. 그나마 선수층이 두껍지 않았던 80~90년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유격수로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경쟁자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포지션 전환의 득과 실은?

야구 좀 했다는 우타자 가운데 꽤 많은 수가 유격수 출신이다. 한대화 한화 감독, 장종훈 한화 코치도 그랬다. 두산 3루수 김동주도 고려대 시절엔 유격수를 봤다. 프로에서는 워낙 경쟁이 치열한 데다, 타격 재능을 살리는 쪽이 해답이 될 수 있다.

한대화는 OB 입단 후 3루수로 뛰었고, 86년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85년 3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이순철은 한대화에 3루를 내주고 중견수로 옮겼다. 포지션 연쇄 이동은 각자의 타격을 살린 기회였다.

장종훈도 89·90년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특히 90년엔 프로야구 최초의 유격수 홈런왕에 올랐다. 애초부터 수비보다 방망이가 뛰어났던 장종훈은 이듬해부터 1루수로 돌았다. 수비부담을 줄여 91년 35홈런, 92년 41홈런을 터뜨렸다.

90년대 최고 유격수 듀오 이종범과 유지현의 포지션 전향도 선수생활 연장에 도움을 줬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김태균(지바 롯데)은 2001년 한화 3루수로 데뷔한 뒤 2002년부터 1루에 서면서 수비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두산 시절 포수를 고집했던 홍성흔(롯데)도 마스크를 내려놓은 뒤 타격에 새로 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