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타자 vs 국민유격수, ‘감독 야구’ 시대 열까
지난 10월 18일 프로야구에 ‘국민’ 칭호가 붙는 두 명의 레전드 출신 사령탑이 탄생했다. 대구에서는 삼성 라이온즈가 박진만 감독대행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 계약기간 3년에 총액 12억원으로 초임 감독으로는 상위권의 계약 조건이다.
박 감독은 현역 시절 ‘국민유격수’ 소리를 들었던 명유격수 출신이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시작해 삼성과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전신)에서 리그 대표 유격수로 활약했고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특유의 부드럽고 여유 있는 수비로 총 5차례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역대 유격수 최다출전·최다안타·최다홈런·최다타점 기록을 보유했다. KBO 40주년 기념 ‘레전드40’에도 선정됐다.
같은 날 서울 잠실에서는 두산 베어스 이승엽 신임 감독의 취임식이 열렸다. 이 감독은 지난 10월 14일 두산 11대 감독에 공식 선임됐다. 계약기간 3년, 총액은 18억원으로 역대 신임 감독으로는 최고 대우를 보장받았다.
KBO리그 역사에서 최고의 타자로 꼽히는 이 감독은 1995년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해 2017년 은퇴까지 수많은 대기록과 명장면을 남겼다. 2002년에는 삼성의 숙원인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풀었고 2003년 역대 한 시즌 최다홈런(56개) 신기록도 세웠다. KBO리그 최초 ‘은퇴 투어’의 주인공인 그는 역대 최다홈런(467개)과 한·일 통산 626홈런의 금자탑을 쌓았다. KBO 선정 ‘레전드 40’에서도 전체 4위에 오른 불세출의 스타다.
‘국민’ 타이틀 절친의 감독 데뷔
이 감독과 박 감독은 1976년생 동갑내기로 현역 시절부터 절친한 관계다. 두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 야구 관계자는 “이 감독은 처음 두산의 제안을 받은 뒤 깊게 고민했다. 두산으로 가면 당분간 친정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삼성은 이 감독과 절친한 박 감독대행의 정식 임명이 유력한 상황이었고, 이에 이 감독도 미련 없이 두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승엽은 ‘국민타자’ 출신, 박진만은 ‘국민유격수’ 출신으로 최근 프로야구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슈퍼스타 출신 감독이란 것도 공통점이다. 최근 KBO리그에서는 팀 운영의 주도권이 감독에서 구단으로 넘어가면서 스타 출신 감독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KT 이강철, LG 류지현, SSG 김원형 등 스타 출신도 있지만 롯데 허문회(경질), 삼성 허삼영(사퇴), NC 이동욱(경질) 등 선수 시절 큰 빛을 보지 못한 감독이 많았다.
외국인 감독 영입도 구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보다는 구단과의 협력, 데이터 활용, 소통 능력 등을 중시하는 최근 야구계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감독의 야구’ 시대가 저물고 ‘구단의 야구’가 새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승엽·박진만 감독의 탄생은 다시 ‘감독의 야구’로 돌아가는 계기가 될까.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은 슈퍼스타 출신이지만 흔히 말하는 스타 출신 감독의 단점(독선적, 자기중심적,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마인드)과는 거리가 멀다. 한 야구 원로는 “이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언제나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다. 야구계에 적이 없다. 지도자와 선수들은 물론 야구계 종사자들에게도 두루 신망이 두텁다”고 평가했다. 박정원 두산 구단주도 사적인 자리에서 이승엽을 직접 만나본 뒤 완전히 매료돼서 감독으로 영입하는 데 직접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 감독 선임 과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일반적인 경우처럼 구단에서 후보를 추린 뒤 모기업 결재를 기다린 게 아니라 이미 모기업에서 이승엽 감독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이승엽 감독의 최종 결심만 남은 상황이었다”라고 전했다.
박진만 감독 역시 구단의 공식 보도자료에서 ‘내강외유형’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부드러움과 강함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삼성 관계자는 “박진만 감독 별명이 ‘만두’라서 유순하고 둥글둥글한 이미지가 있지만 코치 시절부터 지켜본 박 감독은 의외로 강단 있는 지도자”라고 귀띔했다. 실제 박 감독은 감독대행을 맡은 뒤 무너진 팀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하고 선수단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초라하게 퇴장한 스타 출신 감독 많아
오랜만의 ‘슈퍼스타’ 감독 탄생에 야구계와 팬들도 기대가 크다. 지난 10월 11일 ‘이승엽 감독 유력’ 소식이 처음 전해진 뒤 야구 뉴스와 커뮤니티, 소셜미디어는 온통 ‘이승엽’으로 가득했다. 정식 선임 소식이 나오기 전까지 온갖 소문과 예상, 찬반 토론으로 야구계가 떠들썩했다. 취임 뒤에도 이 감독의 ‘옷피셜’부터 등번호까지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됐다. 10월 18일 취임식에는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방송과 신문이 총출동했고, 뉴스보도채널에서 취임식을 생중계할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박 감독 역시 현역 시절부터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스타 출신이다. 이처럼 ‘국민타자’와 ‘국민유격수’의 감독 맞대결이 성사되면서 내년 시즌 두산·삼성 맞대결은 프로야구 최고 흥행 카드가 될 전망이다. 특히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는 이 감독의 스타성은 침체된 프로야구 인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되는 것보다 ‘되고 난 뒤’가 중요한 게 감독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가 성적 부진으로 초라하게 퇴장한 스타 출신 감독은 한둘이 아니다. 감독으로 실패하면 자칫 선수 시절 쌓은 명성까지 금이 갈 수 있다. 친정팀 감독을 맡았던 스타 출신 중에는 팬들로부터 ‘금지어’가 된 사례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팬들은 응원팀 레전드가 감독으로 오는 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두산 구단은 ‘감독 이승엽’의 성공을 위해 전폭적 지원을 예고했다. 코칭스태프 구성은 임명 전부터 상당 부분 교감을 나눴다. 삼성 감독 출신인 김한수 수석코치, ‘최강야구’ 멤버인 정수성 작전 주루코치, 조성환 수비코치는 이승엽 감독의 요청으로 영입한 코치다. 고토 고지 타격코치는 구단의 추천으로 팀에 복귀했다.
이 가운데 눈여겨볼 영입은 과거 이 감독의 현역 시절 선배이며 코치이자 감독으로 친분이 두터운 김한수 수석코치다. 1군 감독은 선수단 운영과 관리, 전력 구성부터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코치진 통솔, 미디어와의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할 업무가 많다. 한 경기는 물론 한 시즌을 치르며 생기는 다양한 변수에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감독의 몫이다. 타격코치, 수비코치, 수석코치부터 감독까지 두루 경험한 김 수석의 조언은 ‘초보감독 이승엽’이 성공적으로 사령탑에 안착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감독의 중요성이 정규시즌보다 커지는 단기전에서 실수를 줄이는 데 큰 힘이 될 전망이다.
두산은 오프 시즌 전력보강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이 감독은 취임식에서 “기존 포수인 박세혁 선수가 FA 자격을 얻는다. 혹시나 박세혁 선수가 팀을 떠난다면 포수 보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면서 “개인적으로 포수 포지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포수가 있다면 야수진과 투수들이 편하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다. 만약 우리 팀에서 가장 필요한 포지션이 뭐냐고 물으면 포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올겨울 FA 시장에 나오는 ‘최대어’ 양의지(NC)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감독은 관리자, 코치 경험 필수 아냐”
일각에선 이 감독이 은퇴 후 지도자 경험이 없다는 점을 약점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선수 출신으로 누구보다 야구에 정통하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최신 야구 이론을 공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코치 경험 없이 바로 감독직에 오른 사례가 이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국내에서는 장정석 KIA 단장이 키움 시절 프런트에서 감독으로 직행해 한국시리즈 준우승 성과를 거뒀고, 허삼영 전 삼성 감독도 코치 경험 없이 감독에 올라 2021 정규시즌 공동 1위 성적을 거둔 바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데이비드 로스 시카고 컵스 감독, 애런 분 뉴욕 양키스 감독, 스캇 서비스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 크레이그 카운셀 밀워키 브루어스 감독, A J 힌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등 현장 코치 경험 없이 감독직에 오르는 사례가 점점 증가하는 흐름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코치와 감독은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명코치라고 다 좋은 감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감독으로 실패했다고 좋은 코치가 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감독이 직접 선수 지도까지 챙겼던 옛날 야구면 몰라도 감독의 역할이 말 그대로 ‘관리자’에 가까워진 요즘 야구에선 코치 경험이 감독을 하는 데 필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 감독은 취임식에서 “기본기와 디테일을 강조하고 싶다. 그 기본기와 디테일은 땀방울 위에서 만들어진다”면서 “선수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겠다. 진중하게 진심을 다해서 플레이하고 조금 더 야구에 몰입하는 선수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 뒤에 결과를 보여주는 선수가 경기에 나설 것”이란 말로 지도자로서 철학을 드러냈다.
박 감독의 능력은 후반기 삼성의 상승세로 이미 검증됐다. ‘박진만 감독대행 체제’에서 삼성은 50경기 28승 22패 승률 0.560으로 LG와 KT, NC 다음으로 좋은 승률을 기록했다. 초반 13연패만 아니었다면 극적인 5강 진출이 가능했을 정도로 후반기 페이스가 좋았다. 특히 유연하면서 합리적인 기용으로 1군 야수진 활용을 극대화해 야수진 사이에서 박 감독을 향한 신뢰가 두텁다. 상대적으로 투수 쪽에선 아직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1군 경기 운영 경험이 쌓이면 자연히 해소될 부분이다.
한 야구 원로는 “이승엽 정도 슈퍼스타의 사령탑 임명은 우리 프로야구에서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선동열 감독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영입 후보라는 소식만으로도 이만큼 큰 화제가 된 야구스타가 또 있었나”라며 “프로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국민타자, 국민유격수 감독 탄생이 내년 시즌 프로야구 인기 회복의 기폭제가 될지 주목된다.
출처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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