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진만 |
| 일찌감치 품절됐던 물건이 다시 쇼윈도에 올라왔습니다. 반들반들 손때를 탔고, 한두군데 보수한 흔적도 있네요. 하지만 워낙 만듦새가 좋은 명품이라 아직은 끄떡없을 듯 합니다. 거기다 가격마저 착해졌습니다. 누가 봐도 군침 돕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화려한 방출 선수.' 명품 유격수 박진만이 시장에 나왔습니다. 아무도 생각 못했던 일입니다. 이게 웬 떡인가, 모두 달라붙었습니다. 고향팀 SK가 한발 앞섰지만 삼성을 제외한 7개 구단 모두 마음은 똑같습니다. 펄펄 뛰는 FA 때도 이렇게 시끌벅적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진만이 누굽니까. 1점차로 앞선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2사 만루 수비, 올림픽 금메달이 결정되는 마지막 공 한 개. 그때 나머지 8명의 야수가 '공아 제발 그 앞으로만 가라'하고 기도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야구공을 가지고 놀 줄 알지요. 심장이 터질 듯 모두 얼어붙는 순간에 혼자 꽃밭을 거닐 듯 사뿐사뿐 움직이는 나비. 그게 박진만입니다. 데려다 놓기만 해도 마음 든든하겠죠. 그래서 그를 잡기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된 것입니다.
박진만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입니다. 95년 10월26일 고려대 야구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시 조두복 고려대 감독이 기자들을 불러모은 겁니다. 프로팀과 스카우트 전쟁이 붙은 세 선수를 '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세 선수란 휘문고 투수 김선우, 광주일고 포수 김상훈, 그리고 인천고 유격수 박진만이었죠.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은 고려대에 진학하기로 얘기가 끝났다.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선수다'라는 걸 공증받기 위한 절차였던 셈입니다.
전화를 받은 다음날인 27일 오전 고려대로 갔습니다. 바짝 쳐올린 상고머리의 고3 박진만이 두 선수와 함께 나왔습니다. 청바지 위에 고려대 유니폼 상의를 걸친 박진만은 기자회견 내내 돌처럼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줄다리기 한가운데 서서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게 한눈에도 역력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조 감독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더군요. 고려대 근처의 한 식당으로 모였습니다. 방에는 조 감독과 세 선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밥을 먹는 내내 조 감독은 열변을 토했습니다. 기자회견 리플레이였죠.
그때 박진만을 비롯한 세 선수는 거의 음식을 먹지 못했던 게 기억납니다. 마음 편히 들라고 수차례 권했지만 젓가락으로 몇 번 건드리는 척 하다가 이내 내려놓고 말더군요. 그리고 그 방에 있던 선수 셋 중 유일하게 다른 길을 걸은 게 박진만입니다. 군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잠시 고려대 숙소에서 나왔다가 당시 선수 사냥의 최고 전문가 그룹이던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트팀에 납치(?)돼 프로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97년 2월. 박진만을 다시 만났습니다. 현대의 플로리다 전지훈련 캠프였지요. 프로 2년차 박진만은 고려대에서 만났던 그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다스베이더'에서 '하회탈'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시 매니저가 방 배정을 할 때 고참들이 서로 박진만을 '방졸'로 삼으려 한다고 귀띔해 줬습니다. 24시간 웃음을 머금은 그 반달눈을 모두들 귀여워했던 겁니다.
밥도 제대로 못먹던 2년 전 그날과는 달리 너무나 밝은 얼굴로 또박또박 말을 잘 하더군요. 정육점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고기는 물리도록 먹었던 것, 고2때 무릎 십자인대를 다쳐 한 해를 쉬며 선수생명의 기로를 맞이했던 것 등 신변 이야기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박진만이 95년 10월 이후 15년 만에 다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끌려다녀 꽤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지금은 모든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박진만이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특유의 반달눈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