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2006년

[테마기획] 흥행 찬물 끼얹는 수비

사비성 2006. 4. 7. 22:25

[테마기획] 흥행 찬물 끼얹는 수비

 

지난달 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과의 아시아예선전. 0-2로 뒤지던 4회말 2사 만루의 위기에서 보여준 이진영(SK)의 다이빙캐치는 두고두고 회자될 명수비였다. 박진만의 메이저리그급 내야 수비와 이진영의 호수비 등으로 한국은 실책 하나 없는 완벽한 게임을 펼치며 세계에 이름을 드높였다. 그런데 국내 프로야구로 돌아오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실책이 쏟아지고 있다. 그것도 어이없는 실책이다. WBC를 보며 수비의 묘미를 알게된 팬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26일 현재 57경기서 총 74개의 실책이 나왔다. 경기당 1.3개나 된다. WBC로 눈이 한껏 높아진 팬들에겐 고급 야구가 필요하다. < 편집자주>

박진만과 함께 최고의 키스톤콤비라는 박종호(삼성)도 어이없는 실책을 했다. 25일 대구 LG전 3-7으로 뒤진 6회초 2사 만루서 조인성의 평범한 플라이를 글러브로 잡았다가 놓쳤다. 가슴으로 떨어졌지만 이마저도 잡지 못했다. 주자 2명이 더 들어와 3-9로 점수가 벌어졌다. SK 정근우도 쉬운 플라이볼을 놓쳐 패배의 원흉이 됐다. 26일 광주 KIA전 3-1로 앞서다 1점을 내주고 이어진 2사 만루의 위기. KIA의 서브넥이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를 쳤다. 짧은 플라이라 한참을 뛰어온 좌익수 정근우는 갑자기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안한 모습. 결국 공은 정근우의 글러브를 맞고 잔디위로 떨어졌다. 이미 주자 2명이 들어온 뒤였다. 3-4로 역전됐고, 이대로 경기가 끝났다. 26일에만 4경기에서 3개의 실책이 나왔다.

조명탑 불빛에 공을 잃어버리는 실수도 있었다. 지난 14일 잠실 두산-삼성전. 3-4로 뒤진 삼성의 7회초 2사 1,3루 찬스. 삼성 2번 박종호가 친 타구는 라이너성이었지만 두산 좌익수 윤승균이 넉넉히 잡을 수 있는 이지플라이볼이었다. 그러나 달려나오던 윤승균은 갑자기 주저앉으며 타구를 머리 위로 날려보냈다. 귀신에 홀린듯한 표정. 조명탑 불빛에 공이 사라져버려 순간적으로 공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론 2루타가 됐지만 팬들로서는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그 플레이 하나로 두산은 이길 경기를 지고 말았으니 팬들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쌓였을까.

콜 플레이가 제대로 안돼 서로 부딪히는 아찔한 순간도 연출됐다. 26일 대구 삼성-LG전서 4회초 박경수의 높이 뜬 내야플라이를 보고 삼성 2루수 박종호와 1루수 조영훈이 서로 잡겠다고 콜을 했다. 둘 다 낙하지점으로 한걸음씩 옮겨 글러브를 갖다 댔고, 공은 조영훈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자칫 했으면 공을 놓칠 수도 있었던 상황. 박종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조영훈에게 한마디하면서 일단락됐지만 프로야구라고 하기 힘든 어처구니가 없는 플레이는 속출하고 있다. < 권인하 기자 indyk@>

수비의 핵심은 집중력이다.

아무리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한다 해도 한순간 방심은 곧 실책으로 연결된다. 실책은 대량 실점으로 연결될 수 있어 더욱 치명적이다. 올시즌 57경기를 치른 현재 8개팀의 총 실책수는 74개다. 지난해 같은 게임수를 치렀을 때의 81개보다는 적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수준 미달의 어이없는 실책이 많은게 문제다. 26일 SK 정근우의 '만세사건'이나 지난 25일 삼성 박종호, 한화 연경흠이 평범한 플라이타구를 놓친 것은 이러한 수준 미달의 집중력 부족 때문이다. 최근 베테랑 수비수들의 실수가 기량적인 측면보다 순간적인 집중력 해이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일성 KBS 해설위원은 수비수들의 어이없는 실책 원인에 대해 "체력 저하, 타격 부진, 개인적 심리 상태와 연관된다"고 분석했다. 하위원은 이 가운데 체력 저하를 가정 큰 원인으로 꼽았다. 체력이 떨어질 경우 내-외야수를 막론하고 수비폭이 좁아지고 순간적인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수록 유격수, 3루수를 맡았던 선수들이 1루수나 외야수, 또는 지명타자로 전향하는 것도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라운드 환경도 크게 작용한다. 야간경기의 경우 조명의 위치가 수비에 큰 영향을 미치며, 낮경기를 치를 때는 햇빛의 방향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 대다수의 선수들이 어릴적부터 '돈'과 직결되는 타격이나 피칭에만 전력하고 수비 훈련은 상대적으로 비중을 낮게 두는 탓도 있다. < 노재형 기자 jhno@>

선의의 의도가 항상 좋을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니다. 올시즌 프로야구에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한 선수들의 수비 겸직이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지난 26일 광주 KIA전. 7회말 SK의 2사 주자 만루 위기. 좌익수 정근우는 KIA 서브넥의 플라이볼을 판단 미스, 머리 뒤로 빠트리며 결승점을 내줬다. 좌익수 앞쪽에 떨어지는 약간은 까다로운 타구였지만 베테랑 좌익수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 대학때 1년 잠깐 외야수를 본 뒤 줄곧 내야수로 뛰었던 정근우에겐 올시즌 외야수 겸직이 아직 익숙지 않았다. 이날 정근우의 뼈아픈 실책은 불펜진 강화를 위해 투수 엔트리를 12명으로 늘려쓰고 있는 SK 조범현 감독이 자기 꾀에 자신이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 이른바 '유틸리티맨'은 때로는 어이없는 실수로 경기의 질을 떨어뜨리는 독소로 작용한다. 낯선 환경, 완벽한 준비를 하지 못한채 임시방편으로 기용되기 때문에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조차 숨을 죽이고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유틸리티맨'의 실수는 내야 전공 선수가 외야 수비를 겸할 때 주로 발생한다. 내야수는 전문 대수비 요원을 둘 정도로 비중을 크게 두지만 외야 수비는 아무나 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 실제로 1루 수비와 외야 포지션을 겸하고 있는 롯데 마이로우는 종종 불안한 수비를 펼쳐, 코칭스태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올해 외야수로 뛰고 있는 삼성 양준혁, KIA 손지환 등도 수비력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많다. 이밖에 KIA 이재주, 현대 이택근, LG 이병규 등 여러 포지션을 두루 섭렵하는 선수들이 많다. 특히 이택근의 경우 투수를 제외한 포수, 내야수, 외야수 등 전포지션에 나서며 '팔방미인' 소리를 듣고 있지만, 부작용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많은 게 사실이다.

좁은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만 살아남는 요즘 사회의 추세는 프로야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통한다. < 광주=김태엽 기자 tapps@>

수비로만 따지면 '경지'에 오른 선수들도 많다.

LG 중견수 이병규, 삼성 유격수 박진만과 우익수 김창희, KIA 2루수 김종국 등이 그들이다. '저런 타구도 잡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펼칠 때가 많다. 호수비는 1%의 감각에 99%의 노력으로 완성된다. 이병규는 타구 판단과 수비 범위에 있어 다른 외야수들을 압도한다. '적토마'란 별명이 나온 것도 기가 막힌 수비를 펼치기 때문이다. 외야수에게 가운데 가장 어려운 수비는 자신의 머리위로 날아가는 타구를 잡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병규는 빠른 발과 빠른 판단력으로 어려운 플라이타구를 '쉽게' 잡아낸다. 막상 이병규에게 파인플레이가 적은 것도 미리 가서 기다리기 때문이다.

박진만의 유격수 수비는 전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지난 WBC를 통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조차 박진만의 수비에 대해 극찬을 한 바 있다. 빠른 타구 판단, 순발력, 부드러운 글러브질, 센스 넘치는 송구 등을 '박진만표 수비'로 표현할 수 있다. 박진만의 경우 화려한 수비의 원동력 역시 선천적 재능이라기보다 후천적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 많다.

김종국 역시 박진만 못지않은 화려한 플레이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중견수 쪽으로 흐르는 땅볼 타구를 잡아 역모션으로 1루로 송구하는데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역시 어깨가 강하고, 타구 판단이 빠르기 때문이다. 김창희의 수비는 폭넓은 수비폭과 강한 어깨로 대변된다. 네임밸류에서는 이병규나 정수근에 뒤지지만 실제 외야 수비 실력만 놓고 봤을 때는 감독이나 선수 등 '업계'에서 인정하는 지존이다. 상대 주자들은 김창희에게 플라이 타구가 걸렸을 때 웬만하면 태그업을 삼가한다. 2루주자의 경우에도 웬만한 단타에는 홈까지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삼성이 강동우를 내주고 김창희를 데려온 이유는 역시 수비 실력 때문이었다.